등산 정보

안나푸르나의 초등과 시련

김보윤 2010. 4. 17. 16:38

네팔 히말라야 중앙에 자리잡은 안나푸르나에 지금 우리나라의 오은선씨가 "여성 최초의 히말라야

14좌 초등"을 노리고 등반을 준비중이다.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8,091m)는 히말라야 14좌  중 10번째의 높이를 자랑한다. 초등은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에 의해 1950년도에 이루어진다. 당시 프랑스 산악회의 회장인 루시앙 드뷔가 친구인

모리스 에르조그를 대장으로 정하고 대원으로는 샤모니 가이드 학교의 강사인 가스통 레뷔파, 루이 라슈날,

리오넬 떼레이 그리고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장 꾸지, 마르셀 샤츠, 마르셀 이삭, 프랑스 최고의

외과 의사인 쟈끄 우도등 9명으로 된 강력한 원정대를 네팔로 보낸다

 

안나푸르나는 당시 어느 누구에게도 등반을 허락하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봉이었다. 원정대는 처음부터

안나푸르나를 노리진 않았다 두개의 목표 즉 다울라기리(8167m. 제7위봉)와 안나푸르나를 정하고

칼라간다키 계곡을 거슬러 올라 막상 다울라기리를 바라보니 당시 장비로는 도저히 오를 봉이 아니라

판단되어 목표를 안나푸르나로 수정하였던 것이다.

 

5월 18일에 드디어 베이스캠프가 설치되고 리오넬 떼레이와 루이 라슈날이 표고 6,000미터까지 진출한다.

고소캠프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6,900미터까지 캠프가 섰다. 제4캠프는 낫처럼 생긴 빙하밑에 있었는데,

운명의 날인 6월 1일 제5캠프를 떠난 에르조그와 라슈날은 폭풍설속에 정상공격을 위해 캠프를 떠난다.

 

이 때 공격조가 가장 걱정하였던 것은 동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먼저 라슈날이 "만일 내가 여기서 되

돌아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에르조그가 대답했다. "혼자라도 가야지...."정상 설원을 한걸음씩

걷고 피켈에 기대어 크게 숨을 몰아쉬며 산소가 희박한 지대를 고통속에 오르기를 8시간여 드디어 오후

2시경에 안나푸르나의 정상에 섰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았다. 에르조그가 프랑스 국기를 들고 등정 사진을

찍었다.

 

                                                 안나푸르나 정상에 선 에르조그

 

 

하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조금전의 행복과 환희가 삽시간에 절망과 비통으로 변할 줄 누가 알았으랴....

정상을 뒤로하자 날씨가 급변하고 화이트 아웃 상태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에르조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장갑을 잃고 맨손이었다. 배낭속에는 또 하나의 예비 장갑이 들어 있었으나 그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행히 제5캠프에는 떼레이와 레뷔파가 올라와 있었다. 이 두사람과 재회한 에르조그는 기뻐서 서로 껴안고

악수를 하였다. 그런데 에르조그의 손을 본 떼레이가 갑자기 "모리스 아니 그런데 자네 손이 이게 웬일인가?"

그제사 정신이 들어 손을 내려다 보니 검푸르게 얼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게 보였다. 동료들은

절망한 기색으로 그의 손을 쳐다 볼 뿐이다.

 

조금있다 라슈날도 무사히 내려왔다 라슈날 역시 심한 동상으로 발이 얼어 신발이 들어가지 않아 떼레이의 것을 신었다. 떼레이는 작은 라슈날의 신발을 칼로 찢어 신고 다시 베이스캠프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때

지원조인 떼레이와 레뷔파는 심한 설맹에 걸려 앞을 볼 수가 없어 동상을 입은 에르조그가 부축을 받은 상태에서 방향을 일일이 가르쳐 주며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눈물겨운 하산을 하였던 것이다.

 

눈사태도 겪으며 필사의 하산을 하고 있을 때 저 밑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르셀 샤츠였다.

마르셀이 대장을 껴안자 아무말 없이 눈믈만 흘릴뿐이었다. "잘했어, 대장! 놀라운 일이야!" 샤츠가 에르조그에게 던진 첫마디였다.

 

이 후 셀파의 등에 업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에르조그에게 의사인 우도가 수시로 썩어가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한다. 그 긴긴 고통의 순간들을 참아가며 카트만두를 향해 내려간다....

 

                                                 동상을 치료하는 자끄 우도

 

 

 

 

 

에르조그의 말이다.

"우리 모두가 빈손으로 찾아간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보배인 것이다. 안나푸르나 등정의 실현을 계기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안나푸르나 등정 후 에르조그는 대원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된다. 루이 라슈날은 1955년 블랑쉬계곡에서

스키를 타다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했고. 장 꾸지는 1958년 11월 베르제봉 등반중 사망 하였고,

리오넬 떼레이는 1965년 베르모 산군에 있는 제르비에 동벽에서 등반중 추락사 한다. 자끄 우도 역시 1953년

자동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반면 에르조그는 그 때의 희생에 대한 보답인지 프랑스 체육부장관을 역임하고. 말년에는 샤모니 시장까지

지낸다 그뿐인가? 그의 등정 기록인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는 책으로 출간되어서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다 주었다....

 

인간의 역사상 처음으로 해발8,000미터 이상의 정상을 오른일은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에 최초이다. 이 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가 "존 헌트경"이 이끄는 원정대에 의해 1953년 5월에

드디어 초등되고(등정자=에드먼드 힐라리. 텐징 노르게이) 세 번째로 낭가파르밧이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되며 히말라야의 황금시대의 개막을 알린다. 이후 세계 2번째봉인 카라코럼의 K2가

데지오 대장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의 대원인 아틸레 콤파뇨니와 리노 라체델리에 의해 최초로 정상에

발길을 허락한다. 

 

이번에 안나푸르나만 등정하면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14좌 완등을 이루는 모양입니다. 세계적으로

등반 사조가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 바뀐지가 언젠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상업등반대가 추구하는 피크헌팅이 대세이니.... 암튼 여성 최초의 히말라야 14좌 완등도 쉬운일은 아닐겁니다. 기왕 시작한 일 무사히

안전하게 끝내고 돌아왔음 합니다.

 

다만 신문이나 방송등 각종 매스컴에서 세계 최초니 뭐니 해서 너무 떠들지만 않했으면 좋겠습니다....